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은 인생의 동반자였던 사라를 잃고는 한동안 하염없이 울기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연약해서 운 것이 아닙니다. 상실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애통하는 것은 지극히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사람다운 당연한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아픔은 우리가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아픔 중에 하나입니다. 내 몸의 일부를 잃어도 그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그 고통이 더 큽니다. 이 고통은 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삽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실의 고통을 맛보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그런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를 치료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없이 슬퍼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곧 일어나 헷 족속에게 나아가서 자신은 그저 나그네이니 자신의 아내를 매장할 장지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에 모든 헷 족속이 성문 앞에 모였고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에 힘입어 소할의 아들 에브론이 소유한 막벨라 굴을 구입하겠다고 뜻을 밝힙니다.
당시 헷 족속은 아브라함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묘실 어디든 사라를 장사해도 좋다고 했지만 아브라함은 이것을 더욱 명료하게 하길 원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 사이에서 그들의 땅을 나의 땅인 것처럼 누리고 살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호의에 의한 것일뿐 아브라함의 진정한 소유지는 한 걸음 걸을 만큼의 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소할의 아들 에브론은 예를 갖추고 아브라함에게 막벨라 굴을 주겠다고 했으며 아브라함이 구하지 않은 밭까지도 함께 "거져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굳이 값을 치르겠다며 에브론에게 밭과 굴의 값이 얼마인지 물어봅니다. 에브론은 당황해 하면서 밭과 굴은 은 사백 세겔이지만 값에 상관없이 아브라함에게 주겠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당시 통용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서 에브론에게 줍니다. 그들이 거래한 곳은 성문 앞이었는데 당시 성문 앞은 노예를 매매하거나 재판을 하는 등 중요한 거래를 하는 곳이었고 성문 앞에 앉은 유력한 자들이 그 거래를 공증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할 장지를 공식적으로 헷 족속에게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정당한 소유지를 얻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적당한 호의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불투명함 가운데 안주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그의 생각은 온통 자신의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그 때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당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상실의 아픔은 너무나 컸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온 인류의 상실의 아픔을 낫게 하실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예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의 초석이 될 그 밭과 굴을 제 값을 주고 구입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이룰 백성들을 값을 주고 사셨습니다. 자신의 핏값으로 우리를 사서 생명을 주셨고 그의 백성을 삼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주님도 정말 중요한 것을 위해서 당연히 값을 치뤘습니다. 적당함에 안주하면 오히려 한없이 멀어집니다. 아브라함 처럼 진정한 가치에 온통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어떤 것이 진정한 가치인지 늘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도 가장 중요한 것들을 위해서 기꺼이 값을 치를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진정한 회복과 행복이 임할 것입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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