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태중의 평안 우리 모두는 태중[胎中] 시기를 겪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미약할 그 때를 어머니의 태에서 가장 안전하게 보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어머니의 태중에서 안전하게 지낸 것을 연상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7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8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잠 3:7~8
잠언의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은 네 '몸(배꼽)'에 '양약(영양)'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8절에서 '몸'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 원어에는 '배꼽'이란 의미를 포함합니다. 마찬가지로 '양약'이라고 번역된 단어도 '영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탯줄은 태중에 있을 때 태아가 어머니로부터 영양을 받는 생명줄입니다. 그 탯줄은 태어날 때 끊어져서 배꼽으로 흔적을 남기고 그 배꼽으로는 더 이상 영양을 섭취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배꼽이 치료되어서 다시 배꼽으로 영양을 받아 누리게 되고 뼈가 윤택해 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면 태중에서 아무 걱정 없이 가장 좋은 영양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이 인생이 평탄해진다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성경도 태중에 있는 아이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부족함 없이 양육 받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그런데 간혹 그 안전하고 평안한 태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크게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태중에서 그 기대와 사랑을 받던 아이가 조용히 사라졌는데, 우리의 마음은 찢어지듯 아픈데 이 아이들이 어찌 되었는지 조차 알 길이 없어서 마음이 무거웠던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열심히 찾아 보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태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아이들은 이렇게 된다라고 명확하게 알려주는 말씀은 성경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이 어떠하신지에 대해서는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3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4낙태된 자는 헛되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5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 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전 6:3~5
전도서에서 말씀하는 낙태된 아이들에 대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낙태된 아이들이 비록 허무하고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는 것 같지만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며 진정한 만족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낙태된 아이들에게 평안을 주신다고 전도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평안을 주셨으니 낙태된 아이들은 반드시 천국에 간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서도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대로 무언가를 성실하게 행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렇다고 꼭 떨어지는 답을 들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말미암아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태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평안을 허락하시는 주님이 햇볕을 보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선하게 역사하신 것처럼 그 택하신 아이들, 태중에서 세상을 떠난 아이들에게 선하게 행하셨음을 믿습니다.
#2_하나님을 택한 자의 평안 토요 전도 모임에서 가끔 만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의 결혼예배가 매우 은혜로왔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랜만에 모임에서 얼굴을 본 부부는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알렸습니다. 자매의 배가 이만큼 불러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큰 기쁨으로 축하하며 태중의 아이인 '이삭'을 축복했습니다.
전도를 마치고 차 모임을 하면서 우리의 대화 주제는 '선택과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 자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어떤 종교든 좋은 종교라면 다다익선이라고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심하면 타로도 보고 여기저기 많은 종교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평안은 없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만을 믿기로 정했을 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맛 볼 수 있었다는 아름다운 고백을 들었습니다.
저는 거기에 살짝 말을 보탰습니다. 부부의 결혼이 아름다운 것 또한 그렇습니다. 세상에 수많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있지만 그래서 선택의 폭이 넓지만 그 많은 선택의 폭이 오히려 우리로 방황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수억 명의 사람들 중에 나의 사람을 정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사람에게 영혼의 닻을 내리고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서로가 서로를 선택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고 그렇기에 결혼은 더욱 값지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물이 풍부한 곳이어서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농사의 신인 판을 위한 제단을 그 곳에 지었는데 그 인근에는 다른 신을 섬기는 수많은 신전들이 그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너무 아름다운 것이었는데 그 고백에 담긴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는 "세상 수많은 신들 중에서 예수님만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찾아와 주신 예수님을 우리도 사랑할 때 이 사랑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며 우리를 구원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3_아들 셋 모임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태중에 있는 이삭이의 성별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흐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딸만 셋입니다. 사람들에게 "저는 일관성이 있는 사람입니다"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습니다. 듣는 분들마다 "딸 셋이라 너무 좋겠다. 딸들이 나중에 비행기 태워준다"는 말로 축복해 주곤 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저로서는 그 자매도 태중의 아이가 딸이길 바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아들을 낳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 뭔가 특별하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저를 더 놀라게 하는 말이 이어져 나왔습니다. "저는 아들을 셋 낳을거예요"라는 것입니다. 듣던 모두가 다 의아해 했습니다. 그 자매가 말을 이어갑니다. "우리 남편이 너무 착하고 늘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데 내가 아들을 낳으면 남편을 닮은 아들일 것이고 나중에 그런 아들과 결혼하는 여자는 나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해서 그런 아들을 셋을 낳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남편 형제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우리 모두는 이 고백이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결혼을 앞둔 한 자매도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저도 남편 닮은 아들 셋을 낳을거예요"라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모두는 껄껄 웃으며 흐믓해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을 받고 자란 청년들이 남편을 존귀히 여기고 아내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므로 천국을 맛보는 가정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가정들이 이 땅에 더욱 많아지기를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아름다운 이름이 더욱 널리 퍼저 나가길 소원합니다. 사랑합니다.

[사진 모진찬]
|